*스피커를 켜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에리히 프롬의『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하면 사랑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사랑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본질은 잃어버리고 물질만 바라는 현대인에게서 더 이상 사랑은 찾아볼 수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걸까?

영화 파니핑크는 사랑에 대해 의미있는 답변을 제공한다. 사랑받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는 파니를 통해 현대인을 투영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의 고독과 정체성, 그리고 세상을 껴안으며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던진다. 파니핑크는 현대인의 삶에서 더 이상 사랑이 무의미한게 아니라 찌들고 무의미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맺음으로서 이어지는 감정 또한 사랑이라 말한다. 즉, 자신들의 공간안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사랑을 외치는 주인공들을 통해 인간의 내밀한 심리를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잘표현한 모리스 도리 감독의 파니핑크는 낯선 타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조차 잃어버린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조금은 위안이 되는 그런영화이다.




1. Nobody Loves Me, Keiner Liebt Mich(원제 :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영화 파니핑크는 파니의 카메라 앞에선 파니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카메라 한가득 잡혀있는 파니의 표정은 이미 지칠대로 지친 표정이다. 결혼정보회사의 카메를 통해 지독히도 냉랭한 말을 내뱉는 파니에게서는 더 이상 사랑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 30세 이상의 여성에게서 남자를 만나는건 원자폭탄 맞는것보다 더 힘들다는 파니는 여자의 행복에 남자가 꼭 필요한건 아니라는 아이러니한 대사를 읆조린다.

슬픈눈과 지친표정을 번갈아가며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속의 파니는 매력적인 젊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온통 검은색으로 휘어싸인 옷차림으로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서 토로한다. 한편으로는 남자에 대한 열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지만 한편으로 외로움에 누군가의 손길 또한 그리워하는 파니의 모습은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저렇게 매력적인 여성이 왜 스스로 “나 자신도 날 사랑하는건 힘들 것 같아요”라는 내뱉을 정도로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을까?




영화 첫시퀀스의 파니의 모습은 현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장면이다. 낯선사람들 속에서 상처받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자신을 고립시키지만 결국엔 그 외로움에 견디다 못하는 파니에게선 누구나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구에게서나 사랑받지 못할거라는 외로움과 두려움과 끔직함 속에서 이러저러한 변명을 가져다 붙이기에 급급한 파니는 사실 배우자를 원한다기 보다 인생의 변화를 줄 누군가의 손길을 원하는게 아니었을까한다. 즉, 죽음과도 같은 삶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누군가를 고대한 것이다.




2. 죽음의 이미지


“내 삶이 레코드 판처럼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한 줄 한 줄씩..내 자신이 그걸 느껴요. 레코드 바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끝 부분? 중간 쯤? 아니면 지금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르죠...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파니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는 파니의 감성만큼이나 황폐하고 냉랭하다. 낙서로 가득채워진 벽과 푸른빛이 감도는 어두운 조명아래 있는 아파트, 그리고 온통 커텐으로 드리워진 파니의 방. 거기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지닌 이웃들은 황량하고 기괴스럽기 그지없다. 다양한 삶들의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아파트지만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은채 살아가고 있는 파니에게 있어서 거주의 공간은 더 이상 편안한 곳이 아니라 무덤과도 같이 죽어있는 공간이다. 더 이상의 소통이 불가능한 단절된 공간에서 파니는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이란 모임에서 만들어 놓은 관을 방안에까지 가져다놓는 자기파괴적 행위를 통해 어떠한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참담한 쓸쓸함만 더욱더 가중될 뿐이다.




폐쇄적인 생활방식으로 인해 참담한 죽음에 직면하게 된 파니에게서 삶을 견디어 내는건 그저 관안에 누워 조용히 읆조리며 죽음을 곱씹는 것 뿐이다. 사방이 막혀있는 고립된 삶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파니에게서 죽음은 어쩌면 새로운 삶으로의 희망이 아닐까 한다.




3. 점령술사 오르페오


"봐, 넌 그게 문제야. 없는 것이나 불가능한 것, 반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불평,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넌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있잖아. 일, 집, 가족, 좋은 피부색, 그런데 대체 뭘 더 바래?"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파니에게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파니의 운명은 바뀌어진다. 사방이 꽉 막힌 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오르페오는 파니에게 있어서 특별한 인물이다.



점령술사라고 소개한 오르페오는 어떤 주술적인 힘으로 엘리베이터를 움직인다. 아파트 관리자의 도움을 받는게 아니라 오르페오의 주술적 힘을 통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것이다. 물질문명, 이성적인 문명, 문화의 도움보다는 문화 저너머의 어떤 주술적, 마법같은 감성적 힘을 통해 파니의 닫힌 마음을 스르르 열어버린 오르페오는 어쩌면 파니의 긍정적 자신일 수도 있고 주위에 존재하는 따듯한 마음의 이웃일 수도 있다. 재미있게도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라는 이름을 닮은 이 친구는 흑인에다 동성애자이며 뺀질뺀질한 사기꾼이다. 백인사회에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을게 뻔히 보이는 이 점령술사는 조금은 슬퍼보이지만 여전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스스로 소외됨을 유도한 파니를 꾸짖으며  관계맺기에 서투른 파니에게 “누굴 위해서 한 번이라도 자신을 희생해 본 적 있어? 항상 자신만 생각하지?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라고 말하며 파니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오르페오를 통해 소통을 시작한 파니는 이제야 자신을 사랑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30대의 매력적인 여성으로 사랑스럽게 웃을줄 알게 된다.




4. 사랑과 희망, 그리고 삶


"겁내지마, 과거는 뒤에 있는 너의 모습이고, 미래는 앞에 있는 너의 모습이야. 과거와 미래는 항상 너와 함께 하는거야. 그것이 가끔 널 유혹할거야. 잠시 앉아 쉬라고, 휴식을 취하라고..네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약속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말 듣지마.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가. 그리고 시계는 차지마. 항상 몇 시인지만 알리려고 하니깐..그 보다는 '지금'이라는 시간만 가져. 알겠지?"




현대인의 소외감을 세밀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영화 파니핑크는 오르페오의 죽음과 파니의 변화로 끝을맺는다. 창밖으로 관을 버림으로서 그동안의 사랑할 줄 모르는 마음을 버림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파니는 타인과의 만남이 자기사랑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영화 초반의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한 이웃들이 파니가 주최한 파티 속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따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르페오 한 사람이 전해준 파니의 변화가 타인과의 삶속에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준 마지막 장면에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진다.

삶에서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쩌면은 타인과의 만남속에서 조금의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지 모르겠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먼저 배운 파니가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닮은 남성에게 과감하게 다가감으로서 새로운 사랑으로의 도약을 이뤄냈다. 누구나가 타인과의 만남에서는 실수하고 상처받지만 자기애를 통해 두려움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장면장면에 흐르는 에디뜨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야,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의 선율에서는 다짐과도 같은 결의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있으며 누구나가 변화할 수 있는 희망의 다짐 말이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07.01.12 여름용영화 간략메모  (0) 2007.07.12
검은집  (0) 2007.06.26
2007.3.29 최근 영화메모  (0) 2007.03.29
폴라로이드 작동법과 고래의 도약  (0) 2007.03.24
jackass...바보들의 무한도전.  (0) 2006.12.05
AND